※ 이 글은 중앙일보에 기재된 글입니다 (2015.05.26 11:41)

 

'하늘이 열리는 꿈의 분만장', 작은 불씨를 피우다

 

“이번 제안에도 또 떨어졌어요…”

 

작년이었나보다. 벌써 두 번째의 고배를 마시게 된 산부인과 오교수님의 한숨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부터 들려왔다. 새로운 분만장 공간을 병원에 제안했는데, 이번에도 떨어졌나 보다.

 

산부인과 분만장은 어느 병원을 가더라도 비슷한 공간이다. 밀폐된 공간, 출산용 베드, 차가운 흰색과 은빛 도구와 기계들까지 산모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하다. 물론 안전한 출산과 위생을 위해 그렇게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산모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기대하는 설렘보다 걱정과 두려움을 더 키울 수 있는 공간 디자인이지 않을까?

 

오교수님은 산부인과 전문의로만 분만장을 바라보지 않고 산모의 입장에서 바라봤다. 그래서 새로운 분만장 공간, 즉 출산의 기능 말고도 산모의 불아한 심리마저 보듬을 수 있는 공간을 제안한 것이다. 그런데 또 한 번 제안이 채택되지 않아 심란했던 것이다.

 

오교수님과 알고 지낸 지가 어느덧 4년이 지났다. 전공의 수련 세미나에 인테리어 관련 특강을 하러 갔다가 만난 이후로 페이스북 친구이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라는 공감대로 인연의 끈을 이어왔다. 늘 산모와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진료를 하는 분이라 새로운 분만장을 제안한 것이 채택되지 않았다는 말에 내가 다 서운할 정도였다.

 

오교수님은 의사의 권위보다 환자와의 소통과 진료 공간의 환경 개선에 관심이 매우 높았다. 공간 디자이너인 나로서는 ‘말이 통하는’ 상대였던 셈이다. 병원 리모델링을 협의하려고 만난 의사 선생님들은 대체로 권위를 앞세우고 일방적인 소통으로 일관하였다. 요즘 말로 철벽남, 철벽녀가 따로 없었다. 그리고 ‘답정너’의 자세였다. 즉 논의를 해도 이미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라는 태도를 보이기 일쑤였다. 하지만 오교수님은 페이스북을 통해 내가 알지 못했던 의사선생님들의 고충을 토로하고, 또 분만장이라는 공간의 속살도 보여주셨다.

 

언젠가 오교수님과 마주 앉아 차 한 잔을 나누며 분만장의 추억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모든 공간은 의미와 스토리를 담고 있다. 일과 놀이, 삶과 죽음 등 공간은 쓰임새와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 의미에 따른 스토리를 담는다. 산부인과와 분만장도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이루어지는 스토리와 의미를 보여준다. 나도 분만장이라는 공간이 낯설지는 않다. 아이 셋을 낳았으니 어쩌면 익숙한 공간이다. 그리고 매번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곳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저만 그런가요? 제 경우엔 애 셋을 낳아도 아프긴 매번 똑같던데.”

 

한참 진통에 시달리다가 하늘이 노랗게 보일 정도가 되어서야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던 출산의 기억은 복잡하고 미묘했다. 출산의 기쁨과 더불어 끔찍한 고통까지 함께 떠올랐던 것이다. 동시에 극과 극의 경험과 감정을 느껴야만 하는 분만장은 감성적 치유의 공간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출산의 트라우마를 고치기란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출산할 때 산모들이 고통을 덜 느끼도록 하늘이 열리는 분만장이 있다면 참 좋겠어요.”

 

하늘이 열리는 분만장? 오교수님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공간을 말한 이유는 산모의 고통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푸른 하늘이라도 바라보며 닫힌 공간에서 느껴야 하는 두려움과 긴장을 조금이나마 해소시키자는 것이다. 이런 분만장의 공간 변화는 이미 외국에서는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얼마 전에 출간한 <공간은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에서도 이런 내용을 소개한 적이 있다. 산모가 산고를 덜 느끼도록 진통하는 간격에 맞춰 화면에 아름다운 영상이 나오는 외국의 진료실을 다뤘는데, 대부분의 산모가 감성적 치유의 효과를 체험했다는 것이다.

 

외국의 사례와 달리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산모의 감성까지 배려한 분만장 공간은 찾기 힘들다. 답답하고 비좁은 환경은 비단 산모뿐 아니라 의료진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이런 상황이 너무나 아쉬웠던 오교수님은 몇 년 동안 분만장 공간 디자인의 개선을 병원에 제안했다. 그러나 번번이 저조한 출산율에 따른 산과(産科)의 수입이 덜하다는 경제적인 논리로 거절당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바로 석 달 전에 그녀의 밝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러 번에 걸친 제안 끝에 분만장 리모델링 승인을 얻어냈다는 것이다. 많은 선생님들도 오교수님의 제안에 공감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아쉬운 게 제안 내용의 전부가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의 환경을 개선하는 정도로 그친 것이다. 그러나 굳이 인상을 찌푸릴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는 게 어디냐며 서로 부둥켜 안고 좋아했다. 작은 불씨라도 일단 살려내면 들불이 될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공간디자인을 위해 분만장을 들어가 보니 자연의 빛은 한줄기조차 찾을 수 없는 답답한 공간임을 새삼 느꼈다. 산모와 의료진의 낯빛이 핼쑥할 수밖에 없다. 진통실을 둘러보니, 환자들은 창을 등지고 있던 침대에 누워 있다. 가장 먼저 침대 방향부터 창 쪽으로 향하게 해서 답답함을 다소 풀기로 했다. 그리고 방마다 화장실 공간의 모퉁이를 사선으로 깎아냈다. 조금이나마 공간이 넓어진 효과를 얻고, 또 규격화된 방의 배치와 다른 공감각적 느낌을 살려냈다.

 

진통실마다 컬러테라피가 될 수 있도록 색감에 의미를 부여했다. 다양하고 풍부한 색감은 아무래도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는 산모에게 안정감과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공간이 사람에게 배려하는 디자인이다. 그리고 복도도 손을 봤다. 일자형 스테이션은 업무 효율을 위해 그대로 두되, 천장과 바닥에 곡선을 연출했다. 시각적인 착시효과로 부드럽고 넓게 공간을 느끼게 한 것이다.

 

병원에 오는 산모를 비롯한 환자들은 모두가 불안하고 초조하다. 특히 진단을 받으려고 CT나 MRI 장비를 사용할 때는 불안감이 더욱 커진다. 이런 환자들의 심리를 파악하여 마음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등장한 게 ‘앰비언트 익스피리언스(Ambient Experience)’ 솔루션이다.

 

이 솔루션은 한마디로 불안한 환자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다. 차갑고 권위적인 진료환경에서 배려와 편안함이 묻어 나오는 환경으로 바꾸기 위해 공간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를 하자는 게 핵심이다. ‘하늘이 열리는 꿈의 분만장’도 단순히 시각적 디자인의 독특함 때문이 아니라 불안한 산모를 배려하자는 공간 디자인의 사고가 배경인 것이다.

 

 

▲ 일자형 복도에 놓인 일자형 간호사 스테이션이지만 천정과 바닥의 곡선을 넣어 시각적으로 넓고 개방감 있게 느껴지도록 변화되었다. (전- 후)

 

▲ 산모가 창을 바라볼 수 있도록 배려한 1인 진통실 (전- 후)

 

▲ 실별 다른 풍부한 색감은 환자에게 편안하고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되었다

 

 

한 달여간 걸친 공사가 끝이 났다. 오교수님과 함께 바뀐 분만장을 바라보니 출산 때처럼 미묘하고 복잡한 기분이 다시 한 번 들었다. 일을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 그러나 애초에 기대했던 ‘하늘이 열리는 꿈의 분만장’은 이뤄지지 못한 아쉬움을 진한 커피 맛으로 달랬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다. 비록 제한적인 분만장과 진료환경의 개선으로 그쳤을지 모르지만, 작은 불씨를 살린 셈이다. 이 작은 불씨가 등불이 된다. 산모와 환자를 배려하는 따뜻한 공간으로서의 병원, 두렵고 불안한 게 아니라 치유와 희망의 병원을 만드는, 작지만 의미 있는 발걸음을 또 한 번 내디뎠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공간이 오교수님과 나에게는 새로운 치유 공간의 탄생이 된 셈이다.

 

 

▲ 환자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헬스케어 환경을 위한 솔루션 Ambient Experience

 

출처 :

https://jhealthmedia.joins.com/article/article_view.asp?pno=15027

- Ambient Experience : 필립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