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중앙일보에 기재된 글입니다 (2015.08.21 09:01)
공사 전 마음 주고받는 소통이 만족스런 공간을 만든다
굳게 닫힌 회의실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결과를 기다리는 심정은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피고인이 된 듯 초조해진다. 굳게 닫힌 문 저 편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가는지 알고 있으니 더욱 더 마음은 불편하고 어수선하다.
“어떡해요. 너무 늦어지네요. 바쁘실텐데….”
두 번째 커피를 들고 오는 부속실 비서는 괜스레 미안하다는 듯 커피 잔을 살포시 내려놓는다. 멋쩍은 미소로 커피 잔을 들고 또 한 모금 마신다. 달짝지근한 믹스 커피는 기다림을 달래기는커녕 속을 쓰리게 하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회의의 결론이 또 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다.
병원 외래 구역의 리모델링 작업을 할 때였다. 각 회의실마다 그룹별 사용자 미팅으로 공간 구획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오전에 이미 관련 회의를 한 차례 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게다가 공사가 진행중인 현장에서는 엘리베이터 전실에 타일로 선정해야 해놓은 마감재 보드의 견본이 말썽이었다. 한 가지 견본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바람에 실물을 확인시키느라 수원에서 서울에 있는 자재상까지 다녀왔다. 급히 견본을 구해 와서 녹초가 다 된 상태로 회의실에 도착했던 게 오후 6시였다. 그런데 아직까지 건축 회의가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용자들의 협의가 다 끝난 상태로 일의 진행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또 다시 조율이 필요한 일이 생겨버렸다. 그래서 병원장님이 담당 외래 과장님들만 직접 소집을 하여 꼬인 실타래를 풀려고 적잖이 애를 먹고 있었다. 나 또한 머리가 복잡했다. 회의가 끝나면 또 한 번 바뀔 내용을 밤새 정리해야 하는 디자인 팀의 수장이니 머리가 지끈거릴 수 밖에 없다.
바깥이 어둑어둑해지자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회의실 문이 열렸다. 병원장님을 비롯해 각 과의 과장님들이 줄줄이 나오신다. 그런데 저마다 표정이 밝지 않다. 평소 깐깐해 보이던 과장님이 가장 먼저 나오셨는데, 불쾌해진 얼굴로 성큼성큼 복도 저 편으로 사라졌다.
“쉽지 않네요. 의사선생님들이 리모델링에 매우 민감하셔서….”
병원장을 맡고 계시는 수녀님의 양쪽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고작 30cm의 공간을 각자 자기 공간으로 차지하기 위해 담당 외래 실무자들이 얼굴을 붉히는 데 충분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공간을 확보하려는 서로의 마음이 부딪혀 내는 파열음이 내 심장까지 와 닿는 듯했다.
모두가 지친 가운데, 소통에 최선을 다한 병원장님 덕분에 차츰 서로가 이해의 폭을 넓혀갔다. 공간 변화가 절실하게 요청되는 곳으로 구획을 짓고, 실평수가 작은 곳의 외래는 각각의 세밀한 요구사항을 반영해서 마무리했다. 지금도 그때 병원장님이셨던 수녀님을 생각하면, 단아한 머릿수건 안으로 살짝 엿보이던 흰 머리카락이 떠오른다. 어느새 수녀님의 머리가 하얀 백발에 가까워졌던 것이다. 원래 성품이 조용하고 의연하신 분이셨는데 리모델링을 하시면서 마음고생을 진하게 하신 셈이다.
위의 글은 필자의 저서 중 <종합병원 확 뜯어고치는 여자> 중에서 성빈센트병원 외래 리모델링을 진행할 때 부서별 공간구획시 협상과 조율로 끊임없이 충돌하던 모습을 묘사했던 장면인데 다시 떠올려 보았다.
1. 공간디자인의 완성도는 조율과 이해에 달려있다
수 년이 지난 지금. 그때나 지금이나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공사보다 사람과 사람의 조율과 이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아파트 한 채를 공사할 때도 엄마와 아빠, 아들과 딸의 의견이 각각이라서 조율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하물며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는 병원은 오죽할까.
디자이너는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조율을 하고 이해를 구하는 과정을 거친다. 요근래 서비스 디자인이 병원 공사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서비스 디자인의 첫 걸음인 사전 리서치가 가장 중요하다. 충분한 사전 리서치는 결과물을 낳기까지의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여러 디자인 방법론은 사전에 공사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정지 작업뿐만 아니라 첨예하게 부딪힐 서로의 욕구를 미리 알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작업이 구성원들과 공유되지 못했을 때는 공사 과정에서 사사건건 부딪히고 또 부딪히게 된다. 당연히 작업 진척은 더뎌지고 괜히 구성원들 간에 반목까지 생기는 최악의 상황까지 벌어질 수 있다.
최근 다시 문을 연 서울 코엑스몰이 이슈가 되고 있다. 과거에 비해 더 할 나위 없이 화려해졌지만, 매출은 지지부진하다고 한다. 코엑스몰을 오가는 사람들의 숫자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보도가 이어진다. 새롭게 개장한 코엑스몰의 문제를 보니, 이미지와 스타일의 변신만을 내세우고 스토리가 없는 공간은 더 이상 사람들의 호기심을 꾸준히 끌지 못한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코엑스몰은 ‘아시아 최대 지하 몰’이라는 역사성, 곳곳마다 다양한 테마의 쇼핑과 놀이가 공존했던 스토리 등의 추억은 사라졌다. 지금은 마치 강남대로에서 흔히 마주치는 성형미인들의 인상을 주는 듯하다. 아름답지만 이 얼굴이 저 얼굴인 듯한 미모라서 사람들의 호감을 끌지 못하는 비애감마저 엿보인다. 게다가 너무 환한 흰색의 색조는 럭셔리보다 오래 머물고 싶지 않게 하는 질리고 불편한 색감이 되고 말았다.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과거보다 사람들이 덜 찾아오는 코엑스몰의 상인들은 울상이다. 과연 이분들은 지금의 코엑스몰을 원했을까? 또 예전의 코엑스몰을 즐겨 찾던 사람들의 바람은 어디로 갔을까? 새로운 코엑스몰을 기획하고 공사한 사람들도 분명 사전에 ‘조사’라는 것을 했을 텐데 말이다.
리서치는 예전처럼 단순히 책상머리에 앉아 작업된 통계숫자로만 표현되는 작업이 아니다. 직접 사람들을 만나 현상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또 그들이 바라는 내면의 욕구를 이끌어 내는 소통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직접 관련된 사용자들의 모든 마음을 알아내고 수렴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서 구성원들의 욕구를 이끌어 냈지만, 사실상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에는 또다른 제약들이 늘상 따르기 마련이다.
2. 한정된 공간, 모두의 만족은 배려와 이해의 소통으로 가능하다
더 나은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목소리만 반영되어 실패하는 사례도 많다. 공간의 세련미와 쾌적한 환경이라는 명분만 내세우다가 모든 것을 다 바꾸고 치워버려야 하는 바람에 모든 사용자들이 불편을 감수하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명분이라도 누군가는 씁쓸한 마음을 감내해야 할 때도 있다. 리서치는 이런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한 공간 안에서 공존하게 된다. 모두가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바꿔가는 리모델링에서 시작 전의 의견대립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기 전 단계라서 각자가 원하는 것만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대립이 꺼려서 아예 리서치 단계를 건너뛴다면 어떻게 될까? 클라이언트 중에서 가장 높은 사람의 의견만 좇으면 될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의견만 받아들이면, 또 다시 시행착오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두의 마음을 주고받는 리서치의 과정이 중요하다. 때로는 의견대립과 충돌로 서로가 힘들지라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열린 마음을 끝날 때까지 지키며 서로의 조율을 통해 이해관계자가 소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공간이 만들어질 수 있다.
아직까지 이렇게 협의하고 소통하는 리모델링의 추진이 이뤄지고 있는 곳은 많지 않다. 대부분 흔히 말하는 공급자, 즉 사용자들의 의견보다는 제공하고 추진하려는 사람들의 욕구와 바람을 우선하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이런 일들을 추진해가면서 조율하는 것에 대한 힘겨움과 아무런 보상도 없는 이런 작업과 회의를 자꾸 빨리 끝내려는 유혹에 시달린다. 하지만 잠깐의 유혹을 견뎌내는 이가 창대한 결과를 얻지 않겠는가.
사용자간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는 소통은 공간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요소다.
칼럼 글 /사진: 공간디자이너 노태린 ( 공간은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 저자 / 노태린 앤 어소시에이츠 대표)
참고자료
- http://blog.daum.net/shalrud2/7439979 (병원공사에서의 난항은 협의의 진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