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디지틀조선일보에 기재된 글입니다 (2014.08)
그곳에 내가 있고, 내가 있어 행복했다.
요즘 세상 살기 참 힘들다고들 한다. 이 살기 힘든 세상을 견디며 버텨내는 것이 ‘고통’이라고도 말한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커서 ‘힐링 열풍’이 불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많은 이들이 치유를 필요로 한다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현재를 아파하고 있다는 반증일 테니까.
그런데 이젠 또 ‘치유’ 받기 위해 에너지를 쏟고 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음악을 찾아 들어야 하고 좋은 말씀 해주시는 유명인들의 강연이나 책도 챙겨야 하고 경치 좋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야 하고 심지어 돈을 내고 등록하는 힐링 프로그램도 생겨나고 있다는데……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힘겨운 마음을 치유하고 싶은데, 치유하기 위해 다시 힘들어야 한다는 건 뭔가 모순이다.
힐링이란 이렇게 무언가를 해낸 후에야 찾을 수 있는 성과 같은 것일까?
나는 건축자재들이 가득 찬 시끌벅적한 시장골목에 가면 기분이 좋아진다.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관련하여 자주 가야 하는 곳이라 억지로 짬을 내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곳인데 그곳에 가면 어릴 때 내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어린 시절, 집 고치기에 남다른 감각이 있으셨던 어머니 덕분에 나는 일찍이 집 고치는 것을 보며 자랐다. 직접 벽지를 골라 도배를 하거나 원단을 사다 커튼을 만드는 건 어머니껜 아주 쉬운 일이셨나 보다. 그래서 벽지나 원단을 사러 방산시장 골목 일대에 자주 가시곤 했고 그때마다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그 기억 때문인지 을지로 시장 골목 혹은 원단과 커튼이 가득찬 방산시장에 가면 자연히 그때가 생각난다. 알록달록 예쁘고 화려한 벽지와 원단들이 가득한 이곳이 동화 속 세상처럼 느껴졌다. 어머니가 벽지 고르시는 걸 옆에서 지켜보다가 한마디 거들었더니, 벽지 가게 아저씨가 색깔을 잘 고른다며 칭찬해주셨던 일도 기억난다. 가게에서 나와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어머니 얼굴도 떠오른다. 그런 기억들을 떠올려보면 내가 디자이너란 직업을 갖게 된 게 우연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또 하나의 장소. 그곳은 419묘지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얘기지만, 국립 419묘지는 내게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초등 3, 4학년 시절 수유리에 산 적이 있었는데 이곳이 묘지인 줄도 모르고 친구들과 함께 술래잡기며 숨바꼭질을 하며 뛰어놀기도 했고, 학원에 가기 싫을 땐 엄마에게 학원 간다고 하고서 나와 숨어있기도 했다. 나만의 비밀 아지트가 국립 4.19묘지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땐, 다른 사람에게 내 방을 빼앗긴 것 같은 서운함이 들기도 했지만 그곳을 떠올리면 어릴 때의 즐거웠던 기억이 떠오르는 건 여전히 변함이 없다. 물론 요즘같이 학교와 학원 코앞까지 픽업을 해줘야 마음이 놓이는 세상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상상할 수 없는 경험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과거를 회상하며 내가 지금 미소 짓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나는 정신없이 바쁘고 버거운 현실의 고통들이 치유 되곤 했었다.
‘아, 나는 행복했구나. 행복했던 기억이 있는 나는 행복하구나.’
나는 치유란 이런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과거의 나를 만나 현재의 행복을 깨닫는 순간이 진정한 힐링이 되는 것.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바로 이거였어’하며 밑줄을 그으면서 기뻐했던 문구를 소개해 본다.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 이따금 놀라면서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그렇다. 과거의 추억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깨닫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당시엔 그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도 그렇다. 그 말은 곧, 현재 역시 지금은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도 미래에서 다시 돌아볼 때는 행복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현재의 고통이 좀 가벼워지지 않는가. ‘고통을 덜어내는 것’이 치유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어릴 때 경험한 것들은 지나간 아름다움으로 차곡차곡 저장되어 현재의 내가 힘들다 느껴질 때 치유가 되어준다. 과거의 기억을 여는 열쇠는 음식이 될 수도, 물건이 될 수도, 향기가 될 수도, 음악이 될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존재했던 ‘공간’들이 매개가 될 때 더욱 확실해진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선택이라고 한다. 어떤 행복을 선택할 것인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너무 멀어서 보이지도 않는 행복? 아니면 항상 내 안에 있어왔던 행복? 어느 것을 선택하든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행복을 쫓는 일은 멀고도 허망하다. 행복은 예전부터 존재하던 것에 있다. ‘공간’은 그 행복을 끄집어 내준다. 행복을 꺼내는 것이 진정한 치유이다.
치유 받고 싶은 자, 자신이 존재했던 지난 시절, 즐거웠던 공간을 떠올려 보아라. 당신의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치유를 느낄 때 과거의 좋았던 기억 속 함께하던 공간을 생각하며 현재의 행복을 맛보는 순간은 아닐까?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 이따금 놀라면서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