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중앙일보에 기재된 글입니다 (2015.06.08 15:16)
은밀하게, 치열하게 병원을 바꾸다
터파기 공사가 시작됐다. 하필이면 병원 앞마당이다. 병원을 오가는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중이다. 그 시선은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오는 듯하다. “도대체 뭘 뜯어고치려고 이 난리야!”라는!” 눈빛이 쏠리는 기분이다.
요즘 병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어수선한 게 분위기가 좋지 않을 텐데. 분명 온 나라를 패닉에 빠지게 한 메르스의 여파로 병원이 어느덧 불편하고 불안한 공간이 되고 말았으니 공사 중인 모습이 곱게 보일 리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작년부터 계획했던 이 공사를 미뤄왔다 이제야 시작을 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이 이목을 끄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오늘 터파기를 하는 곳은 응급실 공간이다. 나에게 응급실 공사라면 지독히 잊지 못할 스토리가 있다. 약 5년 전 일이다. 병원 공사에 관록이 붙어 전국의 공사 현장을 돌아다닐 무렵이었다. 자신감도 붙고 인정도 받던 시절. 소아응급실과 성인 응급실 입구를 나눠 만들던 차세대 응급의료센터 공사였다.
공사가 마무리되어갈 즈음, 작업자의 부주의로 갑작스레 불이 나는 바람에 공사 현장이 순식간 타버리고 말았다. 현장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채 1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불이 번지고 만 것이다. 천만다행 인명피해가 없었지만 완공을 눈앞에 두고 마감한 곳곳이 온통 새까맣게 그슬린 현장을 보니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픈 환자들의 틈바구니에서 마치 투명인간처럼 소리 소문 없이 빠르게 일처리를 해야 하는데, 병원을 아수라장을 만들고 나서 몸 둘 바 몰랐던 기억은 나에게 공사자의 책임과 소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웠던 일대 사건이었다.
병원 공간을 바꾸는 일은 다른 작업보다 더 치밀하고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가뜩이나 몸과 마음이 편치 않을 환자들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줘서는 안 되니까. 고통스러웠던 응급실 화재 사건은 매번 큰 작업들을 시작할 때마다 되새김이 된다. 이번에도 별문제 없이 조용히 공사가 마무리되기를 바라며 현장을 바라보며 기도를 하고 마음을 다진다.
이번 터파기 공사를 시작한 응급실은 다소 복잡한 작업이다. 실내 동선을 바꾸는 것 말고도 건물의 일부를 넓히는 증축공사도 포함되어 있다. 그만큼 많은 안전수칙과 법규사항을 지켜야 하고, 그렇기에 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유기적인 협업을 이끌어내야 한다. 이때 공간 디자이너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나 다름없다. 현장의 작업자들, 병원 관계자들, 심지어 일부 환자들의 움직임까지 조화를 이루게 조율한다. 그래야 팀워크를 최상으로 이끌어내어 진정한 완성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메르스 사태가 일어나기 전부터 구획했던 평면 작업이었지만 예전부터 격리공간에 대한 사전협의가 반영되었기에 결정된 도면 그대로 진행되는 데에 무리가 없다고 판단되어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요란한 공사 소음을 줄이려도 가급적 소음이 나지 않는 장비를 쓰고, 최대한 빨리 일이 효율적으로 마무리되도록 인원을 추가로 더 쓰는 것도 티가 나지 않는 공사의 노하우라 할 수 있다.
전체를 본다는 것은 미세한 작은 것까지 다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병원 공간을 설계할 때, 휴게실이라 해서 휴게실 공간만 보는 것은 통찰력이 부족한 것이다. 휴게실로 이어지는 동선의 효율성이나 편의성, 일반인이 아닌 환자의 상황에 맞춰진 공간 배치 등 주변 환경의 미세한 요소도 아우르는 사고가 필요하다. 또한 한 공간을 만드는 것은 그 공간이 사용될 미래까지 고려해야 한다. 예측 가능한 상황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공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공사 진행 과정에서 발생할 변수까지 고려해야 ‘티내지 않는’ 공사가 가능해진다.
요즘 들어 설계 관련한 학과를 졸업한 학생들을 보면 걱정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평면도 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이미지나 영상 작업과 같은 시각적 작업에만 열중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그것은 대부분 직장을 얻기 위한 스펙이 공모전 위주의 상을 받기 위함이기 때문에 기본에 충실하기보단 보여주는 것에 치중하려 들기 때문이다.
최근 메르스 여파로 병원 공간 작업을 사례로 한 강연 의뢰는 많이 연기가 되었다. 그런데 강연보다 실제 공간을 바꾸는 것과 관련한 문의는 더 많아지고 있다. 아무래도 감염의 파장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오랜 시간 동안 병원의 크고 작은 공간을 바꾸면서 늘 비슷한 사람들의 반응을 겪는다. 공간이 바뀌면,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바뀐다. 병원을 찾거나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태도가 달라진다. 나는 그저 티내지 않고 공간의 변화를 이뤄낼 뿐이다.
메르스의 공포는 의료체계뿐 아니라 공간의 혁명적인 변화를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병원의 크나큰 타격을 그 어느 누구도 보상해 주지 못하는 현실에서 지금 각자의 병원 환경을 돌아보고 ‘사람을 위한 공간’이라는 원칙을 지키며 사용자가 만족할 수 있는 병원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분명 혁명적인 변화가 이루어져야 하지만, 아픈 환자들을 배려하는 본질 그 원칙을 지키면서 조용히 단단하게 공간을 바꿔 나가기를 바란다.
글 : 노태린 / 노태린 앤 어소시에이츠 대표 / 한국헬스케어디자인학회 홍보이사 / 공간은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