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중앙일보에 기재된 글입니다 (2016.03.09 09:01)
오헨리의 같은 병실을 디자인해야 좋은 이유
집이나 학교, 병원, 사무실, 쇼핑센터 등의 ‘공간(space)’을 떠올리면, 으레 미관상 아름다움이나 생활의 편리함, 아니면 높은 자산 가치를 먼저 떠올리곤 한다. 집에 대한 투자를 고려할 때 학군과 교통, 평수 등을 가장 먼저 따진다. 그러나 공간은 자산의 가치보다 사용 가치를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공간이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의 희망과 일치했을 때, 그곳을 집이라고 한다.”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말이다. 집은 삶의 희망을 담고 있는 공간이다. 평당 얼마라는 것이 희망의 전부가 될 수 없을 테다. 내 삶의 희망을 키울 수 있는 보금자리이어야 한다. 공간이라는 환경이 희망을 가지게 할 때, 그 공간은 집이라 부를 수 있다.그래서 사람들은 환경을 꾸미는 것에 그토록 신경을 쓰는 것이다.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는 “건축가들의 자유를 향한 의도가 사람들의 실제적인 행위와 부합할 때, 건축은 긍정적인 효과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그의 말도 희망을 품은 공간이 집이라는 설명과 부합한다. 집은 자유의 공간이다. 감금과 통제, 억압의 공간이 될 수 없다.그래서 사람들은 집을 통해 평온과 안락함을 얻으려 공간 구성을 설계한다. 또한 안락한 집처럼 대부분의 건축을 자유와 행위의 긍정적인 조합이 이루어지도록 환경과의 조화를 고민하는 것이다.
일본 오사카 IGT병원의 치유환경
최근 일본 오사카공항 근처에 위치한 IGT 병원을 벤치마킹하게 되었다. 최근 회사의 프로젝트 중 하나가 인터벤션 병원을 설계하는 것인데, 이번에 다녀왔던 이 병원은 많은 부분에 있어 참고가 될 만한 사례들이 있었다. 병원은 암 말기 환자가 치료를 받도록 최적화된 환경으로 설계가 된 곳이다. 그래서일까. 병원의 위치부터 범상치 않았다. 오랫동안 종합병원에서 권위자로 일하셨던 병원장님 호리 선생은 환자들이 창밖에 펼쳐진 넓은 태평양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병원을 지었다고 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높은 빌딩에 병원의 위치를 선정한 것이다.
이 병원의 병실은 거의 뷰에 따라 1인실, 특실 등이 구성되어 있었다. 4인 병실은 유독 바다가 보이지 않는 조망이었지만, 일부러 발코니를 만들어 꽃밭을 만들어 놓았다. 내부 디자인 또한 북유럽의 가정집처럼 안락한 거실 분위기를 느끼게 만들었다. 식당을 특정한 공간으로 구획하지 않고, 병실에서 밖으로 나오면 모일 수 있는 거실처럼 구성한 것이다.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커피를 마시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편안하게 만들어 놓았다.
사실 "내 집과 같이 편안한 병원"의 콘셉트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많은 병원들이 특실을 비롯한 병실마다 이러한 콘셉트를 적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병실만 그렇게 했을 뿐, 병실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는 병원은 병원일 뿐이었다. 긴 복도로 펼쳐진 공간의 좌우로 방이 늘어선 우리나라 병동 구조처럼 말이다. 그러나 일본의 이 병원은 병원의 동선 구획마저 집의 개념으로 본 매우 획기적인 케이스였던 것이다.
예전에 어느 병원의 암 병동을 계획할 때였다. 각각의 방마다 정원을 만들어 주고, 마치 펜션처럼 공간을 계획하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다. 환자의 심리적 치유를 고려하여 가급적 자연적인 요소를 반영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병원 공간에 대한 선입견과 병실 숫자에 민감했던 터라 아이디어로만 남았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일본 IGT 병원을 돌아보니, 그때의 아이디어가 실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경건축이 접목된 공간 디자인에 대하여
지난 2006년, 국제신경학회에서 유명 건축가이자 하버드대학 교수인 프랭크 게리(Frank Gehry)는 “인간의 뇌가 모양, 색깔, 질감과 같은 건축 요소들에 대해서 왜, 그리고 어떻게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반응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면 건축가들이 더 나은 건축과 공간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사람은 공간과 상호작용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교감 기능인 두뇌의 신경도 건축의 중요한 연구 대상이라고 하는 게 ‘신경 건축’이다. 즉 공간과 건축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건축을 탐색하는 학문이다.
‘신경과학(neuroscience)’과 ‘건축학(architecture)’의 합성어인 ‘신경건축학(neuroarchitecture)’은 몇 년 전부터 한국에도 소개됐다. 최근에 병원설계를 위한 워크숍에서 우연히 신경 건축 관련 다자인이 언급된 적이 있다. 병원 내부 공간의 천정 높이에 대한 디자인을 설명하는데 신경건축 연구 결과로 잘 알려져 있는 조앤 마이어스-레비(Joan Meyers-Levy) 교수의 사례를 소개해 보았던 것이다. 천정 높이에 따라 수학문제를 푸는 성적이 달라진다는 연구의 내용을 토대로 브레인스토밍을 하면서, 병원의 진찰실과 병실에도 천정의 높이, 혹은 천정 디자인의 형태에 따라 환자들이 느끼는 심리상태가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안고 설계에 적용해보자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앞으로 병원 환경도 점점 사람의 뇌와 인지작용 등에 미치는 영향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디자인들이 많이 나오지 않을까.
사람중심 공간디자인의 의료 환경
공간에서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지금까지 건물에 지배받으며, 사람이 건물에 맞춰 살아왔던 많은 병폐들을 반복하고 살아왔다. 미리 계획된 건물의 구획들에 사람들을 끼워 맞추는 관행이 아직도 남아 있다. 다시 구조변경을 하더라도 여전히 사람 중심의 공간보다 건물 중심의 공간을 반복하고 있다. 그나마 최근에는 이러한 부작용을 알고, 건물 안에 살아갈 사람들의 특성을 미리 파악하여 공간 구성에 반영하려는 노력이 늘고 있다. 각각의 공간마다 의미를 부여하면서 동선을 기획하고자 하는 클라이언트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노력들이 결국 환자 한사람을 소중히 생각하려는 사람 중심의 공간을 만든다. 마치 병실이라는 공간 그 자체가 마지막 잎새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이런 공간을 통해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바람이다. 이런 바람이 담긴 공간이야말로 디자이너의 혼이 깃들어 있고, 또 환자들의 희망이 담긴 공간이지 않겠는가.
출처:
- https://jhealthmedia.joins.com/article/article_view.asp?pno=165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