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중앙일보에 기재된 글입니다 (2016.02.12 09:16)
병원, 감성공간으로 바뀌어야 한다.
요즘 부쩍 ‘요양병원’이라는 타이틀을 단 병원이 눈에 띈다. 지난해 가을에 열린 의료 관련 세미나 때, 나는 요양병원과 재활 병원에 대한 국내외 사례들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때 조사했던 자료들을 살펴보니, 관련 시장은 갈수록 팽창하는 중이었다. 요양병원 진료비만 해도 지난 2008년에 1.4조 원이었는데, 2013년에는 무려 4조 원으로 늘어났다.
의료법을 보면, 요양병원은 의사 또는 한의사가 의료를 행하는 곳으로 정의되어 있다. ‘요양환자 20인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의료서비스 제공을 목적으로 개설된 의료기관’이다. 일반 병원과 달리 특수한 목적으로 설립된 병원이다. 그런데 요양병원의 특수한 목적은 간혹 다른 요양 ‘시설’과 헷갈리게 한다. 그저 고령의 노인 분들을 수용하여 수발을 드는 곳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요양병원을 또 다른 양로원처럼 이뤄지는 요양 시설로 잘못 알고 있기도 하다. 재활병원도 요양병원처럼 특수한 목적으로 설립된 병원이다. ‘재활을 통하여 일상생활 또는 사회 복귀를 목표로 하는 전문적인 재활 치료기관’이다.
목적이 다르니 공간도 달라야 한다.
요양병원과 재활병원과 관련해서 다양한 포트폴리오가 없던 나로서는 자료 조사마저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크고 작은 병원 네트워킹이 잘 이뤄져있는 소셜 그룹에 나의 고충을 토로했다. 그러자 많은 분들이 자료를 보내주셨고, 그 중 몇몇 자료에 언급된 병원을 직접 둘러볼 수 있었다. 실제 둘러 볼 수 있는 몇 군데도 찾아 가보게 되었고, 그나마 생각했던 것보다 시설과 환경의 차별화에 성공한 곳도 볼 수 있었다.
당시 요양병원과 재활병원에서 현업으로 계신 분들도 좋은 의견을 전해줬다. “바닥이 미끄러지지 않아야 한다‘, ’코너를 돌 때 반사경이나 벽면 자체가 조금 깎여 잘 보이도록 한다‘, ’침대 사이드레일이 올라가 있어야 한다‘, ’침대 높이가 노인 기준으로 종아리나 무릎 높이여야 한다‘ 등 수많은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 중 가장 많은 의견은 어르신의 낙상방지에 대한 것이 많았다.
많은 의견들을 수렴하여 정리를 해보니, 결국 요양병원과 재활병원의 주 사용자, 즉 환자들의 입장을 반영한 목소리가 컸다. 일반병원과는 목적뿐만 아니라 사용자도 다르니 공간과 설비도 ‘다름’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령의 노인이나 움직이는 게 불편한 재활 환자이니 마땅히 바닥은 매끄러운 재질을 피해야 한다. 또 모퉁이를 돌 때도 급작스레 부딪히지 않게 시야가 확보되어야 하고, 침대 높이마저 일반 병원보다 낮게 만들어야 한다.
요양과 재활의 특수목적 의료서비스 말고도 공간 구성마저 사용자에 맞춤식으로 만들어야 보다 나은 의료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현실은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천편일률적인 시설이 대부분이다. 즉 기존의 일반병원과 특수목적의 병원이 간판을 보지 않고서는 공간을 구분하기가 힘들다.
병원, 감성 공간으로 거듭나다.
한국의 병원 공간은 많은 발전을 하고 있다. 물론 메르스 사태로 취약한 감염 대처 시스템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등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는 많다. 그중에서 공간과 관련한 숙제도 남아 있다. 공간 구획에 대한 평면 계획을 세울 때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환자와 의료진의 동선이라는 기본을 바탕으로 짜야 한다. 또 병원 설비에 대한 강력한 규제와 법규에 대한 제반 사항들도 세심하게 점검해야 한다. 하지만 요즘 병원의 모습은 묵직하고 네모반듯한 하얀 건물에서 벗어나 치유환경을 갖춘 공간으로 차츰 바뀌고 있다.
아직까지 무섭고 시설이 열악한 환경의 병원들은 많다. 그러나 선례가 될 수 있는 이름난 병원들을 돌아보면, 온종일 따스하고 밝은 빛의 세례를 즐길 수 있는 환자의 공간들이 많이 늘어났다. 곳곳에 쉼터 등의 휴식 공간 말고도 공간 전체가 안락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 색상의 톤도 차갑고 인공적인 것은 차츰 사라지고 있다. 내가 머무는 공간 안에 자연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는 담백함 위주로 표현되고 있다.
다소 밋밋하고, 세련되지 못하더라도 포근하고 안락한 정서를 담은 공간을 가지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오밀조밀하게 공간을 분할하고, 편의적인 기능을 극대화하는 것이 오히려 정서적으로 불편함을 줄 수도 있다. 나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공간이 나를 압도하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작년 11월에 미국에서 열렸던 헬스케어디자인컨퍼런스에서 실제 병원 탐방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방문했던 그 병원은 오로지 환자와 직원들을 생각하는 사람 중심 시설이란 느낌이 들었다. 참가자들은 이 병원의 시설에 대한 장황한 자랑 이야기를 듣기보다 환자가 평온한 표정으로 창밖을 살피는 모습을 보고 슬며시 미소를 짓게 되는 공간의 분위기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병원 공간은 이처럼 가만히 있어도 치유의 느낌을 받는 곳이어야 한다.
요양병원과 재활병원 리서치를 할 때도 공간의 치유 효과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자료 중에서 나에게 매우 인상적인 느낌을 주었던 병원은 스페인의 산타 리타 노인 병원(Santa Rita Geriatric CenSanteatr)이었다. 이곳을 설명하는 병원 사이트를 가보면, 스페인 감성이 녹아든 음악이 나온다. 그리고 특별한 공간으로의 산책을 떠나는 경험을 제공한다. 위성에서부터 병원 입구까지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마치 내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찍은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 공간은 얼핏 보면 병원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공간으로 연출된 이곳은 자연과 감성을 담아냈다. 단층의 건물과 유기적인 형태의 병동은 복도를 통해 서로 연결되었고, 인공의 조명보다 자연의 채광이 온 건물을 비추고 있다. 이 병원에서 노인들은 신체적 치료와 더불어 감성적 치유도 하는 중이었다.
환경이 건강을 지켜주다.
우리나라의 청풍호 노인사랑병원에 있는 ‘치유의 정원’은 내가 쓴 <공간은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에 자세히 나온다. ‘대지가 품은 이야기, 대지에 담을 이야기, 공간을 만들다’는 콘셉트로 자연과 공간의 자연스러운 일체화를 목적으로 했다. 시원스레 보이는 외부의 자연 풍경과 공간 안의 ‘안마당’은 노인들에게 고향과 추억의 감성을 불러일으켰다. 이때의 공간 구성은 환경으로부터, 공간으로부터 치유는 시작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조선일보의 “[2080 활력 프로젝트] '고령사회' 스페인, 낙상의학과까지 만들어 치료·재활 한 번에”라는 기사를 보면 환경, 즉 공간까지 치료의 범위로 생각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스페인의 중소도시인 헤타페의 헤타페 종합병원에는 낙상의학과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진료과목인데, 낙상으로 다친 환자들을 치료한다. 이 도시에 고령 인구가 자꾸 늘면서 낙상으로 다친 환자도 함께 늘어나자 개설했다고 한다. 치료도 낙상에 따른 재활 치료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게 눈길을 끈다. 이 병원의 의료진은 낙상 환자의 집까지 방문하여 사고의 재발 가능성이나 낙상의 위험도를 점검한다. 즉 환자의 일상 공간까지 치료 범위로 생각하는 것이다. 미끄럼 방지 발판, 낙상 방지용 손잡이, 조명 등 공간의 구석구석까지 들여다본다.
병원은 의료서비스라는 기능이 중요하다. 그러나 가끔 요양병원 시설 등에서 환자들의 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여러모로 아쉬운 생각을 가지게 한다. 병원에 와서 다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런 병원은 치유보다 수용의 기능을 강조한 ‘수용소’이자 어쩌면 ‘감옥’과 같은 답답한 공간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는 이미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었다. 병원도 이런 사회의 변화에 맞춰 진화해야 한다. 요양과 재활 병원처럼 오래 머무는 장소는 치료의 기능뿐만 아니라 노년의 삶이 이뤄지는 공간의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 병원이라는 환경은 치료의 효과를 넘어 삶을 살아가기 위한 감성을 담을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고, 삶의 체념보다 긍정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출처 :
- https://jhealthmedia.joins.com/article/article_view.asp?pno=16483